은혜를 잊지 안했으면(겔23:35)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 49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로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 판매 등 극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을 때에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댕겼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체제나 조직 등 어떤 시스템이 잘못돼서 그것을 고치려고 시작한 개혁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많은 사람의 ‘거룩한 영적 고민’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일에 같은 마음을 품고 있던 수많은 대중이 함께 화답한 것이며, 그래서 종교개혁은 영적 갱신이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다시 서고자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3가지의 모토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둘째,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셋째, ‘Sola Gratia(오직 은총으로)’. 이것은 개혁의 주체를 말하는데,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새로워질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믿음과 성경과 은총을 잊어버리고 놓치게 되면 심각한 죄악의 온상이 되고 극심한 부패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믿음을 저버리고, 성경을 교과서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잊어버리면 우리의 삶도 죄악의 온상이요 영적으로 극심한 부패된 삶이 되고 맙니다.
종교개혁 사건은 역사적 유물도, 박물관의 전시물도 안입니다. 종교개혁은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되어야합니다. 영적개혁을 외치며 개혁의 분신으로 자처하며 태어난 '개신교'가 어느새 개혁의 대상이 된 듯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방어로 맞서기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총으로 모토를 기억하고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이런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끊임없이 살피고 갱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조악으로 부패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사마리아를 오홀라 그리고 예루살렘을 오호리바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살아야하는데 주변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지하고 그들의 종교를 섬기는 모습이 아내가 다른 외간 남자와 부적결한 관계로 음행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 듯이 너희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고 있구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구나?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한구절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23: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있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고 있구나?
그러면서 너희들이 행한 대로 그 죄 값을 담당하게 하시겠다 하십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겠다. 심판하겠다. 하십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 오시기전에 일어난 죄의 참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믿어 모든 죄로부터 구원 받고 속량 받은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 역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계속되는 허물과 죄 된 모습을 보면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 될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사랑하는 여려분 이것을 분명히 믿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행의 풍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와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전부 사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시간제한을 두지 말아야합니다. 태어난 날부터 거듭난 날까지 지은 죄만 용서를 받고 그 후로는 처신을 조심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믿음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은 우리의모든 죄가 깨끗해졌다고 분명히 말한다.
<골3: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번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이미 완전히 끝난 문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매일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신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평생 지을 죄까지 모든 죗값을 완벽하게 치르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는 게 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눈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목사님,제 죄가 완벽히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첫째,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이 없으면 구원과 영생을 언제 잃을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살게 됩니다.
둘째, 십자가 위에서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이 벌할 기회만 노리고 계신다는 생각에 그분의 임재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요청하지 못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이미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하여 그분과 온전히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면 될 것을 죄의 대가를 치러야 다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완벽한 용서를 믿지 못하면 감정이 수시로 널뛰기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굴다가도 느닷없이 움츠러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 이기게 하심으로 이끌고 계신다고 철석같이 믿다가도 갑자기 순간적으로 두려워하고 염려함으로 극심한 불신앙 적인 모습을 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했다가 포기했다가, 끝없이 오락가락합니다. 이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려고 하지 때문입니다. 명심하라! 하나님은 행동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완벽한 사역만(십자가)을 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완벽히 사하셨다고 믿지 않으면 예수님은 한없는 복과 은혜와 기쁨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것을 부어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을 의심하면 그 모든 복과 은혜와 기쁨 그리하고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이것을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구속사적으로 해석을 받아야합니다. 성령으로 인도 받는 우리는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내 자신의 죄를 보게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죄도, 지금현재 범하는 죄도, 앞으로 나의 연약함 허물도 보게 합니다. 이것은 <너는 왜 이 모양이야>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안입니다. 앞으로 용서 받을 것을 보게 하신 것이 안입니다. 예수십자가복음으로 이미 용서하시고 속량하신 <모든 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너를 내가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속량 했어 구원 했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어>하시면서 우리를 죄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집중하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사명에 집중하게 합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해석입니다.
예를 들면
<나와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나의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남편이 10억을 사기당하는 이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있었습니다. 남편에게 분을 내는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비롯해 각종 예배를 드리고 교사로 봉사하며 겉으로는 예수님을 잘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의 사건으로 남편을 애통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미워하며 무시했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제 자신이 구원을 훼방하며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입니다. 그런 나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런 죄도 담당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섬김과 대속물이 되어 주신 것처럼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해 남편을 섬기도 저역시 남편에 대속물이 되겠습니다.
<말씀대로 이루려함이라>묵상하는 중에 회의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안 되면 화를 내고 분을 내는 내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이미 화가 나 있어서 가정이 통재가 안 됩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칼을 뽑으니, 내가 교우공동체와 가족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자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장애물인 나를 이미 십자가로 담당해주셨구나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없어 잡히신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에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경을 이루기 위해 상황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이루는 삶이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내게 주신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붙잡고 가는 것임을 되새겨 봅니다. 때마다 내가 옳다고 내어 뽑는 혈기의 칼을 도로 꽂고 가장 가끼운 식구들에게 말씀으로 죽어지고 인내하는 모습만 보여주기를 말씀의 밥이 되겠습니다.
당신은 구속사적 해석을 받고 삶에 적용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