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아니라 환한 얼굴로...(잠19:11-12)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으며, 허물을 덮어 주어 자신의 영광으로 삼습니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총은 풀에 내리는 이슬 같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를 내고 노하느냐? 허물을 덮어 주고 은혜로 함께 하느냐?전념되는 영향력은 상황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허물을 덮어주고 은혜로 함께는 자는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마음의 양약입니다. 깊은 샘물과 같고 샘이 솟구쳐 오르는 내와 같습니다. 만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으로 완전히 이루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분노와 격동을 쉬게 합니다. 흔들림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노하는 자는 미련한 것을 쏟아 놓습니다. 악을 쏟아 놓습니다.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노를 일으키고 격동하게 합니다. 교만합니다. 악을 꾀합니다. 패망의 선봉입니다. 넘어지게 합니다. 이간질합니다. 시비를 그칠 줄 모릅니다. 뼈를 마르게 합니다. 배척합니다. 멸시합니다. 능욕합니다. 사람들에게 걸림돌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결국은 망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허물을 덮어주고 말씀의 은혜로 함께하는 자이십니까?
아니면 성령님을 통해 주신 분명한 생각이 있는 대도, 자기 생각과 고집대로 자기 취향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노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안습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잠19:23 여호와를 경외하면 형통하고, 만족감을 얻으며, 재난을 피한다.>
성경에 보면 화를 낸 사건들의 결말에 대해서 무려 600번 이상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동생을 죽이는 살인을 가져왔고, 술 취한 노아가 깨어나서 화를 낸 것이 자식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에서의 증오가 스스로 탈선의 길로 가게 했고, 모세의 분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사울 왕의 화병이 정신질환을 유발시켰고, 헤롯 왕의 분노가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을 칼로 죽이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는 죄성의 오염으로 ‘분노조절 장애 바이러스’가 침투되어 있습니다.
화라는 감정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아서 일단 화가 나기 시작되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어집니다. 스스로 분노감정에 휘둘리게 됩니다. 화를 내는 순간부터 심리상태가 공격적으로 바뀌어 가차 없는 응징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를 내는 요인 중 하나는 ‘나는 잘못이 없다.’는 착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는 일이 정말 화를 낼만 큼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명심해야합니다. 화는 오로지 낭비일 뿐입니다. 화를 내는 만큼 반드시 더 크고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화를 낸 시간보다, 수습하는 시간이 훨씬 더 걸립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화를 낸 적이 언제였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쎄요. 요즘 화를 낸 일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 대요.」 할렐루야! 얼마나 멋있습니까!
북코스모스의 최종옥 대표는 억울한 일에도 화를 다스리는 비결 중 하나를 이렇게 말합니다.〈혹시 저 사람이 내 사돈이 될 분인지도 몰라.〉하는 마음으로 참고 넘어간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자화상을 갖게 합니다. 『분노를 참는 것이 사람의 슬기이며,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우리가 분노 감정을 잘 다스리는 만큼 본인 스스로 영예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화를 잘 다스리고 이겨내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서리라는 믿음을 가져라.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지만, 결국 여호와의 뜻대로 성취된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우드렌즈 펠로십 교회 담임목사 부부 케리 슉, 크리스 슉이 쓴 「Be the Message」(당신이 메시지다)라는 책입니다. 몇 해 전에 나온 「래디컬」이라는 책처럼 신앙생활의 근본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단순히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듣는 말씀을 삶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즉 말에서 행동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저자는 매우 진솔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말은 덜 하고 그분과의 동행은 더하고 싶다. 하나님에 관한 말은 덜 듣고 그분에 대한 경험은 더하고 싶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서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묵상된 말씀이 삶에 적용되어 말씀과 동행하고 말씀대로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깨닫습니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가면 그 말씀은 설교이고 그러면서 은혜 받은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고 품은 것으로 행동합니다. 말씀을 나눌 때는 진실한 것 같은 데도 현실에 직면하면 언제 그랬냐하듯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공격적이고 분을 품어냅니다. 왜 그럴까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면에 input 너무 잘됩니다. 속속 들어옵니다. 그 말씀이 내면에서 성령님의 조명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이런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합니다. 그대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순종할 수 있는 삶으로 output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사모합니다. 갈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말씀이 내면에 input 잘되고 순종의 삶으로 output됩니다.
이것이 혀를 길들이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input할수록 승리와 능력의 말씀이 output됩니다.
형편을 중시할수록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말씀순종하면 복있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삶이 진짜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메시지는 삶의 메시지입니다.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는 당신의 모습이 곧 메시지입니다.
어느 형제의 큐티입니다.
나의 마음은 선과 악이 존재합니다. 항상 나의 이익이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 쪽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을 살펴보면서 악한 마음이 우위에 있는 것 같다. 성령님은 이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마라고 있지만 성령님의 마음을 억누르는 악한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선한 말은 행동하기도 힘들고 어렵지만 악한 말은 쉽고 달콥하다. 이렇게 많은 거짓말과 탐욕으로 매일 같이 행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괜찮아 하시면서 용서해 주십니다. 큐티를 자주 못하지만 큐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부부목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안에 함께 계시고 부부목장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나에게 선한 행동을 명령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 해주시는 나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잘했다 칭찬해주시는 나 자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형제가 말씀을 input할수록 승리와 능력의 말씀이 output되는 상태가 안일까요?
2. 화는 오래 품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품들은 오래두면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냉장고에 오래 넣어둔다고 계속 보존되는 것은 아닙니다. 커피나 차 종류도 유통기간이 지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오래품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사람의 장기 속에 음식물이 오래 저장되어 있으면 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비가 위험한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잠언에 보면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풀라.』고 당부합니다.(에베소서 4:26)
저는 진솔하게 여쭙고 싶습니다.
E. 피터슨은 이렇게 실감나게 호소합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십시오. 화내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화를 연료로 삼아 복수심을 불 태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화난 채로 오래 있지 마십시오. 화난 채로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거점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까지 화를 내려고 그러십니까?
계속 지금처럼 화난 감정으로 살려고 하십니까?
계속 골이 깊은 감정으로 지낸다면 스스로 혼란스러운 삶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언젠가 화를 풀 거라면 지금 푸는 게 어떨까요? 당신의 미래 모습을 그려볼수록 쉬운 해법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반드시 해소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분노를 해소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안양대학교 추태화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가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으면 분노의 인격이 형성되어 매사에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옆집에서 ‘불이야!’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싸움을 멈추고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뛰어나갑니다. 서로 화를 내며 티격 대격하던 것이 그렇게 심각한 생사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차기호 <불같은 성령으로 짐장을 감당한 형제>
성령을 품자. 십자가의 은혜를 품자.
우리가 서로 상한 감정으로 불화와 다툼을 일으켰다면 이제는 서로 사이좋은 친구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의 결론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12절을 봅시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총(웃는 얼굴)은 풀에 내리는 이슬과 같다.』
우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낼수록 사자처럼 으르렁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화를 다스리며 웃는 얼굴로 대해주면 풀잎에 맺힌 상쾌한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당신의 마음과 얼굴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화난 얼굴’이 아닌, ‘환한 얼굴’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