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24:4-7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고냐와 유다의 고관들을 비롯하여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을 함께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사로잡아 바빌로니아로 데려간 뒤에 하나는 좋은 무화과담은 광주리, 다른 하나는 나쁜 무화과를 담은 광주리, 나쁜 무화과를 담은 광주리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왕과 고관들 그리고 애굽으로 살겠다고 피신한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멸절하시겠다하신다. 반면에 좋은 무화과 다음은 광주리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좋게 보아 좋게 여기고 인도 하여 세우고 여호와인줄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부어주어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 하신다.
느부갓네살의 포로의 의도는 유다의 왕과 고관들을 잡아간 것은 그들을 볼모로 잡아둠으로써 반란의 싹을 도려내려는 것이었고, 목공과 철공들을 데려간 것은 써먹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가 하나님의 섭리 기운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옮기다와 '이르게 하다라’는 동사를 가능케 한 행위주체는 바벨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이다. 그러므로 포로라는 이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잡혀간 이들은 죄가 없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포로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다 는 것이다.
포로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 흔들지 않는 반석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옮겨놓으심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접붙여주시려는 하나님의 꺾으심이다. 흔들어 옮겨 놓으심이다.
반면에 그에 비해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도망을 간이들은 사람이 볼 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비춰 생각해보면 살 길을 스스로가 찾은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은 붙잡혀가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붙잡혀간 이들은 주님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라 여겼다. 포로로 잡혀가는 잔혹한 그들을 보면서 자신들을 뼈아프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지었던 모든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전심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가져야 만 했다.
회개 혹은 돌아봄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을 흔들어야한다.
마음과 생각을 꺾어야한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요 요새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접붙여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옮겨놓은 은혜를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11장에 보면 돌 감람나무인 우리가 얼마가 꺾였는데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게 되었다라고 소개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남편이 너무 힘들게 한다. 괴롭게 한다. 받은 상처 그리고 억울함 너무 많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나를 꺾고 자존심을 꺾는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한다. 말씀에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처음에는 내가 살기위해 했는데 뒤돌아보니 하나님이 옮겨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한 리필 받는 자리로 나를 접붙여주셨다. 남편이 그 일조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남편에 대한 사랑이 회복되게 되는 은혜를 누린다.
맥추감주일이 하나님이 옮겨놓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이다. 칠칠절의 의미는 출애굽 후 7주 후에 내산에 도착해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주 동안 매일 노예에서 광야의 예배자로 옮겨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이다. 오순절(50일째 되는 날)에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죄에 옮겨진 구원 받은 자임을 보증하신 날이다.
매일 하나님의 옮겨주신 은혜를 누리는 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적용 나눔 : 당신은 꺾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옮겨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자매는 자녀가 원수였습니다. 반항하고 머리에 물들이고 가출하고 담배피우고 미운 짓은 골라합니다. 자녀가 너무 힘들고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식하나 단속 못하면서 무슨 사역을 하느냐는 말에 마음이 꺾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눈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은 말씀묵상밖에 없어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 이런 나를 사용하셔서 자녀가 고통이 되는 가정을 말씀으로 세워가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옮저 놓으셨습니다. 자식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고맙다했더니 자식이 돌아왔습니다.
탈무드가 굴뚝청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굴뚝청소를 두 사람이 올라갔는데 청소를 마치고나니 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고 한사람은 깨끗했다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얼굴을 씻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얼굴을 씻는다면 당연히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가 않다. 탈무드에 의하면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씻는다. 청소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이 시커먼 사람은 깨끗한 사람 얼굴을 보며 자신도 깨끗한 줄로 생각한다. 반면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먼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시커먼 줄로 안다.
그런 일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얼굴 씻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고,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열심히 얼굴을 씻는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보는 일이다.
회개 혹은 돌아봄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을 흔들어야합니다. 꺾어야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요 요새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접붙여야 합니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옮겨놓은 은혜를 누려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 입장에서 도절이 이해 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 욥은 자녀들을 성결을 위해 아침마다 명수대로 번제를 드린 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가진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취하시면 욥도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라면 사탄에게 소유를 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아 내 사랑하는 욥에서 썩 물러가라 했어야 되지 않을까요?
자식도 소요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 놓고 나중에 가서 소유를 이전보다 갑절로 주고 자녀들도 줍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해되십니까?
수요예배에 구속사적 관점의 창세기 말씀을 강해QT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인도 받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주었으면 행복하게 잘살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귀한 아들을 하나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번제로 말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죽일 것 같으면 주지를 말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인생을 살면서 절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현장에서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하나님께 애통하며 탄원한적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옮겨 놓으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아브라함은 어느 순간에 그의 시선과 마음이 하나님께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삭에게 시선과 마음이 가있었습니다. 이삭은 언젠가 사라질 존재입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을 의지하면 사라짐으로 불행하게 됩니다.
흔들리는 것을 의지하면 인생이 흔들립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두려움과 원망과 시기로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시험으로 부활신앙으로 그 믿음을 옮겨놓으십니다. 부활신앙은 영원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입니다.